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세, 어머니 황씨는 당 32세,형은 治浩  
 
  1884년 (6세) 평양 대동강면 국수당으로 이사. 가정에서 한문수학. 동생 信浩 출생.  
 
  1886년 (8세) 한문 서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열 다섯 살 때까지 목동(牧童)생활. 황해도 구월산 주유  
 
  1889년(11세) 부친 별세.  
 
  1890년(12세)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 청년 선각자인 연상의 필대 은(畢大殷)과 교유.  
 
  1894년(16세) 상경하여 서부대정동 소재 구세학당(救世學堂; 일명 元杜宇學校)에 입학.
이 예수교 계통의 보통학교에서 공부하며 예수교 장로회 입교.
 
 
  1896년(18세) 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부의 주선으로 전 훈장 이석관(李錫 觀)의 장녀 이혜련(李惠練; 당 13세)과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파혼을 주장하나 관철되지 않음.  
 
  1897년(19세) 동생 신호와 약혼녀 혜련을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시킴.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동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 여름, 평양 감사 조민희(趙民熙) 등 수백명이 운집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첫 열변. 18조의 쾌재(快哉)와 18조의 불쾌(不快)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함.  
 
  1898년(20세) 1898(20세) 11월 서울 종각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칠대신(七大臣)을 탄핵하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 건의.  
 
  1899년(21세)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 설립(이 초등학교는 한국인 손으로 설립된 사학의 효시이며, 남녀공학의 최초임). 하천 매축공사(埋築工事)로 황무지 개간 사업.  
 
  1902년(24세) 김 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濟衆院;세브란스)에서 이혜련과 결혼 후,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의 길.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雅號)를 도산(島山)으로 함.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동일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에 통학.  
 
  1903년(25세)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교 하변(리버사이드)으로 이사.
아내를 학교에 보냄. 9월 23일 재미 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 조직, 회장에 피선됨.
 
 
  1904년(26세) 기독교단에서 경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 수업.  
 
  1905년(27세) 4월 5일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초대 회장이 됨. 11월 공립협회회관 설립. 11월 20일 순 국문판 [공립신문(共立新聞)]발행. 장남 필립(必立) 태어남.  
 
  1906년(28세)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 패시픽가에 있는 공립협회 회관이 불타 오클란드에 임시 본부 설치(이듬해 돌아옴).  
 
  1907년(29세) 동경거쳐 환국. 동경 체류 중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 애국 웅변으로 청중을 감격케 함. 귀국 후 서울에서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비롯하여,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磁器會社) 설립. 이등박문과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 제의를 일축함.  
 
  1908년(30세) 교육에 몰두하는 한편 경향각처를 순행하며 유세. 국민조직화운동 전개.  
 
  1909년(31세)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창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 안중근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만에 석방.  
 
  1910년(32세) 총독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다시금 일축하고 4월 7일 행주 출발,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남. 이때 '거국가(去國歌)'를 남김. 이갑 등과 위해위(威海衛).북경.청도 거쳐 상해.블라디보스톡 등지 유랑. 산동성 청도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했으나 그 결과는 암담. 한일합방으로 청년학우회 해산.  
 
  1911년(33세) 북만 밀산현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독일.영국 등을 거쳐 도미(渡美) 망명. 가족과 재회. 추정 이갑이 위독하여 500달러의 치료비 보냄.  
 
  1912년(34세)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 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강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첫 동지 송종익과 흥사단 약법을 상의하고 정원도.하상옥.강영소 등 세 동지를 얻은 후 흥사단 조직에 착수. [공립신문]을 [신한민보]로 제호를 바꿔 속간. 차남 필선(必鮮) 태어남.  
 
  1913년(35세)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興士團) 창립.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 동지.  
 
  1914년(36세) 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음.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사. 장녀 수산(繡山) 태어남.
 
 
  1917년(39세) 송종익.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
주로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를 다니며 흥사단 조직 운동 강화.
차녀 수라(秀羅) 태어남.
 
 
  1919년(41세)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 국무총리 대리. 연통제, 독립 운동 방략 제창.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國務委員勞動局總辨)이 됨.
 
 
  1920년(42세) 상해 임정을 강화하여 독립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 설치. 미국 국회 의원 동양시찰단 일행을 북경에서 맞아 한국 독립 협조를 호소함.  
 
  1921년(43세) 임시정부 세력 통일에 노력해 온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 사임.
상해에서 국민 대표회 발기.
 
 
  1922년(44세)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 발족을 지시.
국민회 분쟁 격화, 하와이 지방 총회를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됨.
 
 
  1923년(45세) 봄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동 부회장이 됨. 그러나 동회가 개조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 건설 계획 수립.  
 
  1924년(46세) 북중국 만주 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 탐사.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
 
 
  1926년(48세) 미주에서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추진.  
 
  1927년(49세) 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내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20일 만에 석방.  
 
  1928년(50세)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 독립당 결성. 이때 대공주의(大公主義)제창.  
 
  1931년(53세)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  
 
  1932년(54세)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따라 독립 운동 근거지의 건설 계획을 재검토 중인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 사건으로 이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피체되어 일경(日警)에 인도됨. 6월 7일 인천에 호송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대전 감옥에서 복역.  
 
  1935년(57세) 2월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  
 
  1937년(59세) 6월 28일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11월1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12월 24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1960년(60세) 3월 10일 자정,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에 안장됨.  
 
  1962 건국공로훈장(3.1절) 추서.  
 
  1969 부인 이혜련 여사 별세(4월 21일).  
 
  1973 11월 10일 도산 95회 생신과 흥사단 창단 60주년을 맞아 관민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도산공원에 망우리 공동 묘지의 도산 유해와 미국의 이혜련 여사 유해를 이 안장(移.安葬)하다.  
 
  1978 9월 27일, 도산 탄신 100주년 기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성대히 거행  
 
  1988 3월 10일, 도산 서거 50주기 추모식을 서울 류관순 기념관에서 거행.  
 
  1998 11월 9일, 도산 서거 60주기,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공원에 도산기념관을 건립.